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주 전략 공세 작전/작전 경과 (문단 편집) === 제25군의 진격 === 1945년 6월 24일, 대독승전 기념인 퍼레이드가 한창인 모스크바에서 42년부터 45년까지 제6근위군 사령관을 맡으며 독소전쟁에서 활약했던 이반 미하일로비치 치스차코프 상장은 [[크렘린]]궁의 대기실에서 스탈린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스탈린이 나타나 집무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치스차코프의 회고록 <조선의 해방>에서 적힌 대화 내용은 이렇다. >스탈린: 장군은 전쟁 전에 극동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가? >치스차코프: 예, 있습니다! >스탈린: 장군은 어느 전선을 잘 알고 있나? >치스차코프: 저는 6년 전 연해주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그로데코브에서 핫산에 이르는 국경 지대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스탈린: 치스차코프 동무는 그곳 제25군에서 군단장으로 근무했기에, 일본군과 틀림없이 교전하게 될 제25군 사령관에 장군을 임명하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치스차코프: 최고 사령관 스탈린 대원수 동지! 감사합니다! >스탈린: 이틀 후 비행기 편으로 극동으로 가게 될 것이오. 귀관의 성공을 기원하네. >치스차코프: 스탈린 대원수 동지! 저는 3년 동안 제6근위군을 지휘해 그들과 친숙해져 있습니다. 극동으로 가기 전 제 부하들과 작별할 시간을 갖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스탈린: 그렇게 하시오. 내일 아침 귀관을 비행기로 보내라는 명령을 [[알렉세이 안토노프|안토노프]] 동무에게 전하겠네. 그리하여 8월 폭풍 작전 계획에 따라 한반도 북부로 진격하고 미군과 합의된 대로 38선에서 진군을 멈추며 한반도 북부에 주둔하며 군정을 하고, 결국 북한 정권의 모태를 만들 소련 제25군 사령관에 치스차코프 상장이 임명되었다. 치스차코프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극동으로 향할 장군들은 제25군 부사령관 P. F 라구틴 중장, 참모장 펜콥스키 중장, 포병사령관 G. A 마카로프 중장, 후방사령관 V. S 체렌코프 소장, 통신사령관 보로바긴 소장 등이었다. 치스차코프는 6월 29일에 극동으로 출발했다. 비행 끝에 극동 지역 보로실로프 시에서 조금 떨어진 보즈드워젠카 비행장에 도착해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메레츠코프 원수의 제1극동 전선군 사령부에 도착했다. 메레츠코프에게 신고를 하고 상황 브리핑을 받은 치스차코프는 제25군 사령부에 도착했다. 참모들에게 신고를 받고 제25군 정치장교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 그로모프 대령 등과 제25군의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이들 중 레베데프와 그로모프는 나중에 평양에 주둔하면서 [[북한]] 정권을 창출하는 주역이 된다. 치스차코프는 줄곳 극동에만 있어서 실전경험이 없던 제25군에 독소전에서 숙련된 고참들을 배속시키고 맹훈련을 시켰다. 하지만 최후방 부대의 풀어진 군기는 어쩔 수 없었다. 제25군은 제1극동 전선군 최남단에서 작전을 시작했다. 치스차코프는 2개의 축선에서 공세를 가하기로 결정했다. 3개 소총병사단으로 이루어진 제39소총병군단과 제259전차여단, 제5군에서 빌려온 제72전차여단이 노보게오르기예프카 역에 집결해 공세를 준비했다. 제39소총병군단의 임무는 퉁잉 요새 지대를 고립시키고 퉁잉을 함락하며 왕칭으로 향해 만주와 한반도의 일본군 연결을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군의 좌익에서는 국경수비대와 제108, 113요새주둔군이 훈춘으로 압박을 가하고 두만강을 건너 훈춘과 한반도의 일본군을 상대할 것이었다. 39군 좌익의 공세 전면이 너무 넓어서 제106, 109, 110, 111요새주둔군이 증원되었다. 제88소총병군단은 예비대로 배치되었다가 남진하며 한반도로 진격해 웅기, 나진, 청진을 점령할 것이었다. 제25군의 상대는 일본 제1방면군 소속 제3군이었다. 제1방면군 지역에서 4개 보병대대와 1개 기병대대로 이루어진 제132독립혼성여단이 퉁잉에 주둔하며 남북 30킬로미터의 방어 정면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 제128사단 사령부와 2개 연대는 퉁잉에서 남서쪽 8킬로미터 지점의 롯조커우에 주둔하고 있었다. 128연대의 나머지 1개 연대는 퉁잉 서쪽에서 80킬로미터 떨어진 타치엔창에 있었다. 한편 근래에 제3군은 휘하 사단, 여단, 독립연대들을 재배치했다. 제112사단은 두만강 북안에 주둔해 훈춘 서쪽을 지켰고 제79사단은 투멘 남서쪽에 배치되었으며 제280 연대는 우차이츠 인근에 주둔했다. 제101독립연대는 웅기 북쪽에 제1기동여단은 시흐핑에 주둔하게 되었다. 일본군의 배치가 바뀌자 제25군은 빨리 공격을 해야 했다. 치스차코프는 제39소총병사단의 공격시간을 8월 8일 저녁으로 하고 국경수비대들을 선봉으로 내세웠다. 치스차코프는 국경수비대가 이 지역에서 오래 복무했기 때문에 더 확실한 일본군 화점 제압과 돌파구 형성해 공헌할 것이라 판단했다. 전차여단들이 국경수비대를 따라가며 지원할 것이었다. 기습을 위해서 준비 포격은 생략되었다. 강습 부대들과 선봉 대대들은 공격 위치에 2330시까지 전원 집결했다. 2400시에 공병들이 비 속에서 국경선의 철조망을 제거한 후 9일 자정에 메레츠코프 원수의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소련군 머리 위로 비가 쏟아졌지만 되려 비 덕분에 기습 효과는 극대화 되었다. 일본군은 소련 전투공병들이 초소들을 점령할 때 까지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0100시까지 국경의 모든 일본군 초소들이 정리되었고 0300시에 선두 대대들이 진격해 들어갔다. 제259전차여단을 선두로 제40소총병사단과 제105소총병사단이 0830시에 패드 센나야강과 계곡 북안의 퉁닝 요새지대로 진격로를 뚫었다. 투멘으로 통하는 철도를 따라가 퉁잉 마을에서 전투를 벌였다. 다른 소련군 병력은 국경 요새에서 나와 퉁잉 남쪽의 친겐과 더 남쪽의 파이차오산츠와 투멘츠로 진격했다. 소련군은 8월 10일에 진격을 속개해 일본군의 저항을 상대했다. 제132독립혼성여단장 오니다케 소장은 서둘러서 그의 1개 대대를 요새지대로 보내고 나머지 부대는 서쪽으로 잠깐 퇴각했다. 10일 오후, 제259전차여단과 제40소총병사단이 퉁닝에 입성했다. 그 동안 제384소총병사단은 퉁잉 요새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 무렵 소련 제5군 소속의 제17소총병군단이 남쪽으로 진격해 수이펜호를 공격하다가 제39소총병사단과 통잉 서쪽에서 합류했다. 8월 9일 1700시, 메레츠코프는 제17소총병군단에서 2개 사단을 차출해 제25군에 임시로 배속했다. 한편 메레츠코프는 여기서 전선군 기동예비인 바실리예프 중장의 제10기계화군단을 제25군 지역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8월 10일, 제39소총병군단이 퉁잉 지역의 일본군을 모두 정리했고 제17소총병군단과 합류해 서쪽과 남서쪽으로 진격하며 일본군을 축출했다. 8월 11일, 제17, 30소총병군단이 퉁잉의 철도망을 따라서 왕칭, 투멘, 퉁화, 길림으로 진격했다. 8월 12일 정오, 2개 군단은 남서쪽으로 30~40킬로미터를 행군했다. 돌파구가 순조롭게 뚫리고 안정화되자 메레츠코프는 제10기계화군단을 돌파구를 통해 왕칭으로 진격시켰다. 8월 13일과 14일, 제17, 39, 10기계화군단은 남서쪽으로 진격해 일본군의 단선 군용 철도를 따라 산맥과 숲을 지나 랴오헤이산에서 헤이토사이로 진격했다. 선두의 공병들은 지뢰 제거, 교량 보수, 노면 장애물 청소 작업을 지원했다. 14일 밤, 제25군은 5에서 15킬로미터를 진격했고 행군 대형이 매우 크게 늘어지며 병목 현상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소련군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제132독립혼성여단은 타치엔창에서 패배해 쫓겨났고 제128사단은 롯조커우 지역을 지키느라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일본군은 중대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헤이토사이를 향한 소련군 진격은 2개 축선으로 갈라졌다. 제17소총병군단은 제10기계화군단 소속의 제72기계화여단을 선견대로 세우고 헤이토사이 서쪽으로 타이핀링 도로로 향했다. 제39소총병군단은 제257전차여단과 제10기계화군단 소속의 제72전차여단을 선견대로 세우고 헤이토사이 남서쪽을 통해 왕칭으로 진격했다. 8월 15일, 제17소총병군단은 일본군 제284연대 병력과 헤이토사이 서쪽인 롯조커우에서 교전을 벌였다. 제366소총병사단이 남쪽에서 일본군을 차단하는 동안 제187소총병사단은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내며 역습을 가했다. 선견대인 제72기계화여단은 일본군 집결지를 우회해 타이핀링 도로에 도달해 일본군 제285연대와 전투를 벌였다. 그 동안 더 남쪽에서 제72전차여단과 제259전차여단은 왕칭에 도달했다. 후속하던 제40소총병사단은 일본군 제1기동여단과 교전을 벌였다. 잠시 후, 치열한 전투 끝에 소련군은 일본군의 모든 저항을 물리치고 진격을 계속했다. 제39소총병군단의 선견대가 8월 15일 1700시에 왕칭을 점령했다. 제10기계화군단의 나머지 제대들과 제39소총병군단은 210킬로미터의 도로를 뒤로 하고 진격했다. 제39군의 선두 부대들은 왕칭에서 동쪽 3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친창에 도착했다. 나머지 부대들은 헤이토사이에서 나오는 도로에 늘어져 있었다. 제25군과 제10기계화군단의 공세는 다음 날 절정에 달했다. 제187소총병사단의 선견대와 제72기계화여단, 제17소총병군단은 타이핀링 고속도로에서 전투를 벌였다. 전투 끝에 저녁이 되자 일본군은 도로에 축출당했고 소련군은 도로를 완전히 점령했다. 같은 날, 제257전차여단의 선두 전차들이 제39소총병군단의 선두 병력과 함께 왕칭에서 남동쪽으로 20킬로미터 있는 투멘으로 진격했다. 제10기계화군단의 선두 부대들, 제72전차여단은 옌지를 향한 공세를 시작했다. 25군 공격지역의 남쪽에도 소련군은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공세 첫날, 제198, 113요새주둔군 병력이 훈춘과 두만강 너머의 일본군을 정리하며 훈춘과 우치아츠 요새 지대를 확보하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으로 진격했다. 이 때가 '''소련군이 한반도에 발을 들여놓은 최초의 사례이며, 이와 동시에 한반도에서 일본군이 축출되기 시작한 첫 사례다'''. 소련군은 일본군 제280연대를 우회하여 상챠오셴에 고립시켰다. 8월 11일, 제88소총병군단이 훈춘-투멘 축선으로 진격했다. 그리고 제541소총병연대가 빠진 제393소총병사단이 제113요새주둔군과 합류해 한반도 북동쪽으로 진격했다. 8월 12일 이른 아침, 제393소총병사단은 제113요새주둔군과 산을 넘으며 청학 남쪽에서 일본군 제101독립연대와 전투를 벌였다. 제101 독립연대는 제127사단이 있는 호령으로 퇴각했다. 3시간 후, 0900시, 제393소총병사단의 선두 부대들이 함경북도 웅기에 도착했다. 그 무렵 웅기는 소련군 공군과 해군항공대 폭격기들의 공습을 계속 받은 후였고 [[어뢰정]] 6척에 분승한 해군육전대 병력 60명이 1000시에 기습 상륙했다. 12일에는 [[라선시|나진]]항에 상륙했다. 작전이 시작되기 전 소련군은 웅기와 나진은 일본군의 주요 해군기지여서 격렬한 전투가 될 것이라고 했지만 이 당시 일본 해군은 사실상 전멸상태라서 본토도 방어가 불가능한 실정이었으므로 해상에서 소련군을 막을 수 없어서 해상에서는 사실상 전투가 없었다. 13일 1100시쯤 [[청진]]에 상륙하는 과정에서 소련군은 일본군 1개 연대와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특히 일본군이 미츠비시 제철소로 가는 청진철교를 사수하려고 안간힘을 쏟아 14일 아침부터 14시간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때문에 해군육전대원 60명 중 30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소련군의 함포 사격으로 전세를 뒤집었고 8월 15일 오후 4시경 제25군 선견대가 청진에 도착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남은 사단이 끝까지 저항하여 청진 전투는 8월 18일에 끝났다. 초기 작전 명령은 동해안을 따라 속초, 삼척, 포항, 부산까지 남하하라는 명령이었지만 8월 20일에 느닷없이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져 청진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되돌아갔다. 제393소총병사단은 해군육전대와 합류하여 웅기를 점령했고 1개 대대를 남겨둔 채 나진으로 진격해 14일에 함락시켰다. 16일에 393소총병사단은 청진으로 가는 길에서 전투를 벌이며 1500시에 청진 근처에 도착해 청진을 향해 공세를 벌였다. 더 북쪽, 훈춘-투멘 축선에서 제88소총병군단은 훈춘을 확보한 제113요새주둔군과 세해 인안호 강 북서쪽 10킬로미터 지점으로 진격해 일본군 112사단의 격렬한 저항을 상대했다. 15일에 제386소총병사단이 제35군에서 제25군으로 보내 준 제209전차여단의 지원을 받으며 인하호강을 건너 일본군 제246연대와 전투를 벌였다. 소련군의 도하를 막으려는 일본군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날 밤, 제258소총병사단은 군단의 제2파로 진격해 투멘 강을 건너 훈영으로 진격해 일본 사단의 우익을 때렸다. 두만강 남안의 일본군은 은무피를 거쳐 마유산으로 후퇴했다. 그곳에는 제79사단 소속 제291연대가 참호를 파고 방어선을 구축해 놓았다. 소련군은 이 일본군을 우회해 측방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다음날, 제258소총병사단은 두만강에서 서쪽으로 진격을 재개해 마유산 남서쪽의 일본군 방어선을 공격했다. 제113요새주둔군의 다른 병력은 제386소총병사단의 우익에서 진격해 일본군 제112사단의 좌측방으로 진군했다. 이 기동을 통해 일본군 247, 248연대는 112사단과의 연결이 끊어졌다. 일본군은 이 상황을 파악 못하고 계속 자리를 지켰다. 그 결과로 8월 17일, 투멘-옌지 축선의 일본군은 소련군에게 북쪽, 동쪽, 남쪽에서 일제히 공격을 받으며 괴멸당했다. 또한 만주와 한반도의 일본군 연결은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 제25군 더 북쪽에서 일본군은 완강히 저항하고 있었다. 제10기계화군단 제대들을 포함한 제17소총병군단은 서쪽으로 진격해 타이핀링 도로를 지키려는 일본군 제128사단을 상대했다. 제72전차여단 전차들이 북쪽에서부터 옌지로 진격했고 그 동안 본대는 왕칭에 다다랐다. 제259전차여단의 선두 부대들은 북쪽에서 투멘에 도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88소총병군단이 투멘 동쪽에서 나타났다. 17일, 일본군 제112사단과 제79사단을 둘러싼 포위망이 닫혔다. 제10기계화군단의 선견대는 타이핀링 도로를 6킬로미터 달려서 주요 철로들과 타흐싱처우 교차로를 확보했다. 제10기계화군단의 다른 부대들은 제72전차여단과 함게 왕칭 남쪽에서 니안얀춘에 주둔한 일본군 제127사단과 전투를 벌였다. 제39소총병군단은 제259전차여단과 왕칭 남동쪽에서 진격하며 투멘을 점령하고 일본 제112사단과 79사단의 포위망 돌파 기도를 차단했다. 17일, 제88소총병군단이 마유산의 일본 제291연대를 공격하며 투멘 동쪽 10킬로미터 지점의 함경북도 온성을 점령했다. 포위된 일본군은 항복하거나 자살을 택했다. 일본군 2개 사단이 무너질 동안 제25군은 한반도 북동부를 확보했고 제10기계화군단을 둥화와 길림을 향해 진격시켰다. 제10기계화군단의 선견대들이 제17소총병군단을 뒤에 두고 북서쪽으로 30킬로미터 쯤 진격하여 제5군 부대와 퉁칭쳉에서 합류했다. 퉁칭쳉에는 무단장과 왕칭을 잇는 주요 철도가 있었다. 제39소총병군단과 제88소총병군단은 한반도 북동부의 잔존 일본군과 옌지 남쪽, 투멘의 잔존 일본군을 처리했다. 19일, 제10기계화군단은 서쪽으로 진격을 재개하며 랴오닝 산맥을 재빨리 넘고 청진이 제393, 355소총병사단에게 점령된 날 밤에 퉁화에 도착했다. 한편, 그 전날 관동군의 항복 소식이 무선을 통해 전달되자 대부분의 일본군은 사기가 꺾여버리고 많은 숫자가 저항을 포기한 채 항복을 계속했다. 8월 18일, 바실렙스키 원수는 만주의 전 소련군에게 주요 인구 밀집 지역을 특별 기동 부대를 통해 점거하여 주둔지를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제1극동 전선군 제대들은 병력들을 차출해 소규모 특별 집단을 만들어서 하얼빈과 길림 비행장을 점거하고 일본군 포로들을 그곳에 임시로 수용시켰다. 제25군 남쪽에서는 88소총병군단과 제10기계화군단 병력들이 38선까지 진격했다. 일본군 최후의 저항은 8월 26일에야 끝났다. 퉁잉 요새지대의 일본군은 소련 제106요새주둔군과 1개 독립포병여단, 2개 포병대대에게 8월 9일부터 공격을 받고 있었다. 소련군은 차근차근 일본군의 특화점을 제거해 나가고 총 82개의 특화점을 제거했다. 퉁잉은 8월 25일에 함락되었고 다음날 일본군 901명이 항복했다. 관동군의 항복을 인정하지 않는 다른 일본군들이 곳곳에서 소규모로 저항했지만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항복하거나 전멸당하거나 자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